이런 장르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세간의 화제가 되는 콘텐츠는 가급적 보려고 노력합니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건 꽤나 버겁습니다😅 킬러 워킹맘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흥미로운 영화였고, 사실 무엇보다 믿고 보는 배우 전도연, 그리고 설경구 때문에라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거라 믿었죠. 그런데 사실 세간에는 호평보다는 혹평이 더 많은 편이긴 합니다. 주로 후반부 엔딩에 대한 평가가 그런데요. 저도 마무리는 좀 별로였어요. 하지만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아서인지 나름대로 볼 만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측면에서 영화 <길복순>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길복순>입니다. 킬복순이라고 표기하면서 킬러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설명하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이 영화의 부제로 <워킹맘을 위한 슬기로운 직장생활> 정도로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청부살인도 기업형 비즈니스가 된 세상. 킬러들은 회사에 소속된 성실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승진을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우리네 회사원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다만 하는 일이 살인 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죠. 그 바닥의 동료들이 선술집에 모여서 회포를 푸는 장면은 그냥 딱 일상의 직장인들의 모습입니다. 술자리에서 A급 킬러로 대우받지 못하는 후배 희성(구교환)에게 길복순(전도연)이 이렇게 말하죠.
"실력 따라 대우 다른 건 회사 생활 기본이야."
길복순이 회사가 명령한 작품(살인청부)을 고의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영화의 긴장감이 본격적으로 고조됩니다. 살인은 사실 내키지는 않지만 킬러에겐 철저히 업무의 과정일 뿐입니다. 감정의 동요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프로 직업인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하지만 딸 아이와의 갈등이 길복순 인생에 처음으로 작업을 하는데 머뭇거리게 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킬러들의 세상에서는 아주 커다란 오점이 되고 고객과의 신뢰로 먹고사는 킬러 기업에겐 있을 수 없는 사태입니다. 그래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하지만 파국의 결말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한 다음 펼쳐지는 세상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영화의 엔딩은 소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
길복순이 자신의 일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순간, 갈등이 시작되고 그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에 대해서 의문과 질문을 던지는 때가 언제가는 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내가 원하던 그 일인가? 나는 지금 이 일을 통해서 행복한가?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수록 이런 화두는 더 크게 울려 퍼집니다. 故구본형 작가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어느 새 익숙해져 버린 일상과 결별할 때는 언제가는 옵니다. 데미안의 표현처럼 새는 알을 깨고 나오는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영화 <길복순>은 아주 훌륭한 영화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아주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직업인으로서의 킬러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갈등하고, 현실 속에 힘겨워 하며,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우리와 똑같습니다. 킬러라는 조금은 자극적인 소재가 일상의 변주로 연주될 때 펼쳐지는 묘한 동질감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전히 현역으로서 빛나는 1973년 생 배우 전도연의 연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충분한 보상이 됩니다. 직업인 전도연에게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