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은 모든 색이 합해져야 나오는 색입니다. 아니 색이란 표현은 맞지 않고 빛이라 해야겠죠. 모든 빛이 합치면 흰 빛이 됩니다. 그러나 또 엄밀히 흰 색과 흰 빛은 다릅니다. 흰 색은 흰색이고, 또 모든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번역의 과정이란 흰 고래를 설명하는 일이고, 도화지에 흰 아그리파 석고상을 그리는 행위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흰 것을 묘사한다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 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 하는가?”
단어 하나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의미들이 하나의 단어로 번역되는 순간 흰색은 더 이상 흰색이 아니게 됩니다. 번역은 명료하게 정의내릴 수 없으며 그저 막연하게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이 고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모비 딕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 과정을 그나마 따라하는 행위일 것이라 말합니다.
AI는 대단합니다. 세상을 바꿔버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던 모든 비효율성을 모조리 없애버릴 태세이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에 대한 기준을 바꿔버리고 있습니다. 번역도 그러한 일 중 하나일 테고, 아마도 AI가 번역이라는 행위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효율성은 AI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흰 색을 표현해 내는 일은 결국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는 구분이 없는 명확하지 않는 그 무엇은, 효율과는 대척점에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할 테니까요.
이 책 또한 답이 없는 어떤 불가능한 독해의 시도일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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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뿐 아니라, 책의 디자인도 좋습니다. 암흑같은 검은 바탕에 흰 점들이 무너져 내리며 겨우 보일 듯 말듯 책 제목을 만들어 냅니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좋은 책입니다.
촌장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