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입니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범람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정보가 가진 가치의 유효기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인간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보와 콘텐츠의 구조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레데만 카릭의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바로 이런 니즈를 잘 풀어낸 대담하고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역작입니다.
이야기하는 인간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류를 호모 나랜스 (Homo Narrans) 즉, 이야기하는 인간종 이라고 부르기도 하죠.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는 일관성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표현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뒤죽박죽되면 인간은 혼동에 빠집니다. 어찌되었던 같은 맥락의 이야기로 자신과 우주를 파악해야 하는거죠.
“미흡하거나 오류가 있는 설명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힘이 된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중에서
그렇다면 왜 이야기가 중요할까요? 그것은 이야기 속의 핵심인 내러티브 (Narrative) 때문입니다. 내러티브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라는 형식과 내용 속에 은밀히 들어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내러티브는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개인과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력한 이야기에 매료당합니다.
이브의 선악과
스토리, 이야기, 그리고 내러티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건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 케이스를 예를 들어 보죠.스토리란 선악과를 따 먹은 여자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한 남녀에 대한 서술을 말합니다. 이런 스토리에 담긴 이야기는 유혹, 죄책감, 추방에 대한 이미지와 연상들이죠.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여성은 위험하다’ 라는 비밀스런 메시지 입니다. 어떠신가요? 스토리, 이야기, 내러티브의 차이를 조금 이해할 수 있으시겠죠? 그래서 어떤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잘 짜여진 스토리와 이야기가 필요한 겁니다.
흥행 영화의 공식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서사 구조들이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 TV 프로, 소설, 기사, 등등 모든 형태의 이야기들은 특정한 마스터 플롯 서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지 전달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서사 구조를 선택해야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제대로 심어질 수 있는 거죠.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을 위한 스토리텔링은 이미 검증된 흥행의 서사구조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구체적인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그 뼈대는 몇 가지의 보증된 서사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포인트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평균적으로 ‘가난뱅이에서 백만장자로’ 스토리가 최고 평점을 받았다. 그리고 정확히 이 형식을 따르는 전기 영화가 가장 수익성이 높다… 왜냐면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각색 구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중에서
빌리 브란트의 사진 한장
내러티브는 꼭 서사의 형태를 띄지 않아도 됩니다. 때로는 사진 한장이 더 많은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는 법이죠. 1970년 12월 7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 최초로 폴란드를 국빈 방문합니다. 국립묘지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습니다. 이 사진 한장이 세계로 전파되었고 그 어떤 기사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물론 인생은 만화와 같지 않다…. 하지만 사진 한장을 통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짧은 순간 동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용기를 얻는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중에서
우리 편이 아니면 다 나쁜 놈이야
지금처럼 이야기와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넘쳐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복잡해지겠죠. 그런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복잡성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메시지가 일관성 있고 명료하지 않으면 이런 과정의 불협화음의 긴장감을 외면하려 들고 부정하려고 하죠. 그래서 세상을 단순화하려고 합니다.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흑과 백, 옳은 것과 잘못된 것으로 구획짓고 구분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게 훨씬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죠.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이런 맹복적인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사회의 갈등과 반목이 극심해 집니다. 요즘 정치의 이분법적 분열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건 이런 내러티브 과잉의 시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기후 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기후에 대한 경고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근본적으로 기후변화는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적대자가 없습니다. 굳이 더 정확히 표현하자만 적대자가 너무 많은 거죠. 그래서 서사적인 측면에서 기후 위기를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해서 메시지로 각성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극적인 변화를 몰고오는 영웅의 이야기는 기후 경고 스토리에는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기후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존재했고, 여전히 그 위험성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루한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의 중요한 것들은 훨씬 지루한 것들입니다.팬데믹의 사태를 막기 위한 숱한 예방의 과정들은 지루하고 돋보이지 않습니다. 예방의 과정 속에는 영웅의 여정을 찾기 어렵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그런데 예방은 치료보다 훨씬 더 중요한 프로세스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제로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가 훨씬 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어두운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모든 것이 안전하며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유토피아보다 우리를 훨씬 더 자극합니다. 디스토피아가 더 흥미진진하지만, 지루한 유토피아에 우리의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들은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할 것입니다. AI 시대의 내러티브는 어쩌면 지루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