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2월입니다. 한해를 정리하면서 한국 사회의 주요 키워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겠죠. 항상 11월 중하순에 출간되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트렌드 코리아>이죠. 올해도 어김없이 <트렌드 코리아 2024>가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트렌드라고 하는 시류 또는 현상을 개인적으로 그렇게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반짝 유행하다가 사라져가는 현상들을 일일이 좇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고, 사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는 게 벅찬 나이가 되었기도 합니다. 솔직히 MZ 세대의 감각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 키워드를 한번 정리하고 올 한해 동안 어떤 흐름이 새롭게 등장하고 주류로 관통하는 지를 체크해 보는 건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4>의 몇 가지 인사이트를 소개합니다.
<트렌드 코리아>는 김난도 교수 혼자 쓴 책이 아니다. 전미영, 최지혜 등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연구원 및 다수의 전문가가 함께 썼다. 그런데 항상 표지는 김난도 교수 사진만 나온다. 사진빨이 더 잘 받아서일까?
DRAGON EYES
2024년은 푸른용(청룡)의 해입니다. 왠지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이해서 <트렌드 코리아 2024>의 키워드는 DRAGON EYE, 용의 눈입니다. DRAGON EYE, 각각의 철자로 시작되는 10개의 주제를 선정했는데, 사실 이게 좀 억지스럽다고 해야할 까요? 예를 들면 분초사회를 일컫는 D를 Don’t Waste a Single Second 로 언급하는 식이죠. Dragon을 꼭 표현하고 싶었던 저자들의 과욕이 좀 느껴지기도 합니다.
2024년은 청룡의 해다. 벌써부터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청룡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프로야구 원년멤버 MBC 청룡이다. LG트윈스의 팬이라면 당연히 MBC 청룡도 사랑할 것이다.
분초사회
분초사회는 시간의 가성비를 극도로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말합니다. 콘텐츠는 넘쳐나고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해도 너무 많은 선택지에 주눅듭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선택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더욱 효과적이고 압축적으로 사용하려는 트렌드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영화나 OTT 시리즈를 보기 전에 YouTube에서 결말이 포함된 5분에서 10분짜리 요약영상을 먼저 시청합니다. 내 귀한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다는 거죠. 결론까지 있는 요약영상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 잘 보다가 결론이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았았을 때의 후회를 겪지 않기 위해서죠.
분초사회를 통해 나타나는 실패와 낭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은 자칫 사색과 여유로움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기 쉬울 것입니다. 지름길을 찾으려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사실은 그런 건 없습니다. 어차피 겪어야할 일들은 겪게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분초가 아까운 세상이다. 자신의 시간과 경험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극단적인 효율성의 추구가 우리를 점점 더 피곤하게 내모는 건 아닐까? 좀 실수해도 실패해도 상관없는 것인데.
호모 프롬터스
2023년은 AI의 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죠. 특히 ChatGPT 와 같은 생성형 AI가 일으킨 파급효과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놀라운 발전을 이뤄나갈 텐데, 바로 이러한 생성형 AI를 잘 이용해서 개인과 기업의 능력을 고도화시킬 수 있는 것이 시대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프롬프트라고 하는 대화창을 통해 AI와 함께 작업하게 되는데, 이런 프롬프트를 통해 얼마나 AI를 잘 소통하는 지에 따라서 생산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이란 분야가 엄청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2023년은 호모 프롬터스(Homo Promptus)의 탄생을 알리는 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누가 뭐래도 2023년은 ChatGPT의 한해였다. 얼마 전에 CEO가 잘렸다가 며칠만에 다시 복귀하는 희안한 사태가 있었기도 했지만, 여전히 가장 강력한 생성형 AI 툴이다.
AI 때문에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거나 위축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최고의 결과는 AI와 인간의 능력이 교차했을 때 만들어집니다. AI를 통해 인간의 창의성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으며 개인이나 기업의 생산성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인간의 아날로그적 역량이 오히려 AI 시대에 더 중요지고 있다는 역설에 마주하기도 합니다. 브라이언 크리스천의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책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 흥미로운 시각을 선사합니다. AI가 발전할 수록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가치는 더욱 흥미로워지고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라고 하는 인공지능 경연대회에 출전 도전기. 어떤 요소가 더 '인간적'이게 만드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출간된지 꽤 오랜된 책이지만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가 더욱 묵직해졌다. 강력추천!
도파밍
인간을 설명하는 말 중에 호모루덴스 (Homo Ludens)란 정의가 있습니다. 놀이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뜻이죠. 인류는 먹고사는 문제 뿐 아니라 재미있고 즐거운 행위를 좇으며 진화해 왔습니다. 놀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인 셈이죠. 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더욱 극단적으로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하려 합니다. 도파민은 극도의 흥분과 각성이 일어날 때 분비되는 호르몬입니다. 도파밍은 도파민(Dopamin)을 찾아 끊임없이 헤메는 파밍(farming)의 속성을 합성한 단어입니다.
원래 <오징어 게임>이 나오기 전에는 '무궁화 꿏이 피었습니다'는 어린 시절 가장 흥미로운 놀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즐길 수가 없다. 잘 못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재미있어서 한다'라는 표현이 요즘 MZ의 감성입니다. 굳이 이유와 목적과 의미가 있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재미있기만 하면 오케이인 거죠. 즉흥적 감성의 극단적 추구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SNS의 짧은 콘텐츠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생겨진 감각의 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아무튼 기-승-전-재미 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이런 흐름이 나쁘다고만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의 스토리가 조금이라도 전달이 되기 위해선 진지한 1시간 연설보다는 30초짜리 짤이 훨씬 더 어필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방향타를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또 다른 시대적 요청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육각형인간, 버라이어티 가격전략, 스핀오프, 디토소비, 리퀴드폴리탄, 돌봄경제 등 흥미로운 키워드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각잡고 정독이 필요한 책은 아닙니다. 그냥 쓱 한번 관심있는 주제의 챕터를 펴놓고 '아하, 이런 관점도 있지' 라고 느끼면서 2024년도를 준비할 수 있는 작은 힌트를 얻는 것 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육각형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을 말한다. 노력을 통해 개천에서 난 용은 별로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이다. 날 때부터 탁월해야 환호한다. (매달 저렇게 이 달의 육각형 아이돌을 뽑는 연예 매체도 있다. )